EEYO
보이지 않는 것을 드러내기
고윤정 (토탈미술관 객원 편집장, 이미단체 대표)
이진솔은 ‘인공와우’라는 귀에 부착된 특수 장치를 타고 소리를 전기적 신호가 바뀌어 청신경세포를 통해 뇌로 전달되면서 소리를 듣는 작가이다. 작가는 일반인처럼 완전한 소리를 듣는 것은 아니지만, 머리에 부착된 자석에 의해서 전달된 소리를 듣는 훈련을 하면서 소리에 대해서 인식하게 되었으며, 점점 ‘소리’는 작가에게 주요한 작업의 주제가 되고 있다.
직접적으로 소리가 명확하게 들리는 것보다 각각의 소리는 높낮이, 굵기에 따라서 다양한 긁는 소리로 치환되어서 작가에게 전달된다. 이러한 물리적인 전달성 자체는 작가로 하여금 저절로 펜으로 드로잉을 하였을 때 마치 캔버스를 긁는 것 같은 전파의 모습을 반영하는 과정으로 드러난다. 작가가 의도하지 않았음에도, 소리는 뾰족한 펜으로 긁는 듯한 형상으로 표현된다. 소리는 압력의 높고 낮음이 진동하면서 전파되어 나가는 파동인데, 일반적인 소리가 아닌 작가에게 체화된 상태로 전달되는 파동은 자연스럽게 삐죽빼죽한 선으로 나타나는 것이다. 그것을 그리는 과정은 캔버스 작업으로도, 라이브 페인팅이나 퍼포먼스, 영상 등으로도 여러 방면으로 나타났는데, 그때 작가의 ‘귀’는 세상의 소리들을 모아 음파를 전달하는 전달자의 역할을 하고, 몸은 마치 악기처럼 그것을 표현하는 도구가 된다.
개인전 <형태 간의 소통을 위한 자각:관계>(2019)에서 작가는 한 구석에 여러 가지 작은 소도구 같은 타악기를 종류별로 전시했는데, 같은 선반에 있는 악기는 작가에게 같은 파동을 전하는 악기들이다. 작가의 몸은 소리와 캔버스의 매개체로 역할하여 일반 사람들이 놓치고 있는 일상의 소리를 시각화한다. 관객은 이 타악기의 소리를 직접 연주하여 보면서 멜로디가 있는 소리, 다양한 높낮이가 있는 소리가 어떻게 단순한 타악기와 가장 비슷하게 들리는지를 체험하여 볼 수 있다. ‘소리’는 일반적으로 ‘바람 소리’, ‘갈대밭 소리’, ‘파도 소리’ 등 감정적인 느낌이 연상되기 마련인데, 이 작업에서 타악기와 연동되면서 힘과 균형, 크기, 높이와 같이 측정가능한 형태를 보여주고 있다.
또한 이 소리는 물과 만나면서 다르게 변형된다. 작가가 사용하는 인공와우 장치는 물이 닿으면 안되기 때문에 수영장이나 계곡에 가면 녹음기에 마이크를 연결하고 실시간 입력되는 소리 신호를 기록할 때가 있다. 깊은 수심의 세기에서 나오는 소리나 얼음이 녹는 소리는 이렇게 미디어를 통해 다른 시각적인 과정으로 변화 가능성을 드러낸다. 작가는 특히 물과 만나는 과정을 <가끔은 물고기가 되고 싶다>(2019) 작업에서 보이듯 물 속으로 침투하는 과정을 영상과 퍼포먼스로 보인다. 작가에게 인공와우 장치는 머리를 누르는 자석 때문에 필요하지만 동시에 고통을 수반하는 장치이기도 하다. 그래서 장치를 빼기도 했다가, 다시 착용하기도 했다가 하면서 어느 날 문득 보았던 수족관의 물고기와 자신을 동일시한다.
물고기는 밖으로 귀가 보이는 것은 아니지만, 물의 움직임, 수중의 음파를 탐지하는 다양한 감각기관으로 소리를 느낀다. 작가는 때로는 이러한 물고기가 스스로 되기를 자청하면서, 직접 고안한 장치에 머리를 넣고, 마치 물고기같이 보이도록 하면서 ‘말하기 연습’을 한다. 물리적인 전달 과정의 유사성은 물고기와 작가가 동일시되면서 좀더 자연스럽게 소리를 듣고, 세상을 향해 달려나가고 싶어하는 작가의 바램을 은유한다.
소리를 듣지 못하니까, 오히려 소리에 더 집중하면서 ‘어떻게 보고 느끼는지’를 탐구하는 과정에 중점을 두고 있는 이진솔은 <소리=진동>(2019), <목소리의 울림성>(2019) 등의 작품을 통해서 소리가 전달되는 과정, 여러 가지 오브제가 나는 파동으로 사운드 아트 작업을 선보였다. 마이크로 전달되는 목소리로 인하여 다양한 형식의 작가가 만든 작은 악기가 울린다든지, 움직인다든지 하는 것이 그 내용이다.
이진솔은 소리를 장애와 비장애의 경계에 세우고, 자신이 경험한 비장애적인 상황, 장애 때문에 겪는 일들과 엮어 세상과 매개하는 과정을 표면에 드러낸다. 상처받았던 경험, 힘들었던 경험을 이 경계선상에 놓고 곱씹어 보는 것이다. 이진솔의 작업에서는 이러한 감정적인 경험들이 주가 되지만, 작가에게 체화된 소리에서 캔버스로, 혹은 설치 작업으로 이어지는 연결고리들은 오히려 그에게 보다 세상을 차갑게 바라보고, 물리적인 환경에 대한 세밀한 관찰, 그것을 몸으로 드러내는 방법에 대하여 인지하게 한다.
그리고 체화된 작가만의 여러 기법들은 조금씩 ‘퍼포먼스’의 형식으로 나타나고 있다. 1970년대 퍼포먼스가 대두되기 시작했던 시기에 많은 여성 작가들은 자신의 사회적인 이슈를 드러내기 위해서 몸을 사용한 바 있다. 마리나 아브로마비치, 수잔 레이시 등 후에 다른 작업으로 알려진 예술가들도 초기작에서는 자신의 신체를 긁거나 도구로써 사용하여 행동주의적인 경향을 보였다. ‘몸’으로 무엇을 한다는 것은 그만큼 자신이 가장 치부로 느껴지는 부분을 드러내면서라도 예술가적인 의견을 전달한다는 의미가 있다. 이진솔은 자신의 몸이 느끼는 것을 ‘인공와우’라는 장치로 인식하고, 이를 캔버스로 내보내면서 자신의 처한 상황과 퍼포먼스를 자연스럽게 연결시킨다.
작가는 <가끔은 물고기가 되고 싶다> 작업에서 보여주는 <말하기 연습> 퍼포먼스를 통해 자신의 이러한 염원을 보다 연극적으로 구체화시킨다. 소리를 못 듣는 작가는 사람의 입 모습을 보고, 인공장치를 빌어 어느 정도 어떤 뜻인지 상황을 파악할 수는 있지만 그 정도가 완벽하지 않을 수도 있고, 또 작가가 내는 소리도 아주 정확하지는 않다. 그러한 상태를 그대로 드러내면서 낭독을 먼저 청하는 퍼포먼스는 1970년대의 여성 미술가들의 흔적들처럼 긴장감이 흐른다. 직접 호스로 연결하여 아크릴 반구 속으로 작가의 두상이 들어가는 순간, 혹시라도 숨이 막히면 어떻게 하나 하는 불안감은 작가의 진지함과 긴장감을 그대로 전달한다. 이 퍼포먼스에서는 인공호스를 관람객이 잡고 있어 호스를 통과하면서 느껴지는 진동을 관람객에게 전달하고자 하였다. 혹여 진동이 관람객에게 전달되지 않더라도 파도에 휩쓸려가는 작은 물고기처럼 그조차도 작가는 물고기와의 상황을 작업에 투영시킨다.
이진솔은 몸으로 체화되어 자연스럽게 캔버스로 연계되는 퍼포먼스에서 ‘장치’를 이용한 퍼포먼스로 다음 단계를 밟아가고 있다. 이러한 장치는 소리를 전달하는 ‘귀’처럼 작가와 물속을 연출하는 다른 장치를 매개하고 있다. 중간적인 단계에 어떤 ‘장치’를 연결하여 작가는 여러 가지 방식으로 세상과 소통을 하고 싶어 한다. “형태 간의 소통을 위한 자각:관계”라는 말처럼 작가가 세상과 혹은 주변인들과 관계를 맺는 것은 어떤 ‘장치’를 통해서만이 가능한데, 캔버스, 전시장, 전시 서문, 캡션 등의 다양한 요소가 하나의 전시를 이루고 전시의 정보를 전달하는 것처럼 작가가 고안해 낸 ‘장치’들은 ‘소리’라는 정보를 시각적으로 드러내는 여러 가지 방식을 보인다. 작가는 ‘퍼포먼스’를 더 해보고 싶다고 이야기한 바 있다. 지금까지의 행보대로 ‘퍼포먼스’를 보다 다양하게 시도하면서 세상과 소통하는 매개적인 장치를 보다 확장된 방식으로 보여줄 수 있기를 기대해 본다.